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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리의 메모장/진중문고

「진이, 지니」by 정유정

by 보미와 겨우리 2020. 6. 16.

진이, 지니

새롭고, 경쾌하고, 자유로운 이야기로 돌아온 정유정이 펼쳐낸 또 다른 세계!「악의 3부작」이라고도 불리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두운 숲을 탐색하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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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곳에 불시착하는 때가 있다. 내가 왐바 캠프를 떠나던 날이 그랬다.
- 「진이, 지니」 p.7

 한 편의 잘 만든 영화를 보고 나온 것 같다. 400페이지를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흡입력 있다. 소설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다던 동기 녀석이 3일 만에 다 읽고, 재밌다며 주변에 추천하고 다닐 정도로 쉽고 재밌다. 그러나 소설의 주제는 삶과 죽음, 종을 초월한 교류와 연대를 담은 이야기로 결코 가볍지 않다. 무거운 이야기를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내는 게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내게 「진이, 지니」는 좋은 이야기로 남는다.

 「진이, 지니」는 생과 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김영민 교수의 책 제목이 책 말미에서 떠올랐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와 같은 말이라고 믿는다. 지금 당장 내게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한 점 부끄러움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소설 속 이진이는 바로 그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한 선택을 했고, 김민주는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을 이어나갔다. 정유정 작가는 보노보 원숭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인간다운' 삶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제시했다.

"나는 진이야, 이진이." 
- 「진이, 지니」 p.15

 「진이, 지니」의 '지니'가 인간과 유전적 차이가 1.3%밖에 없는 보노보가 아니라, 이구아나였다면(카프카의  「변신」이 됐겠다ㅋㅋ)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못했을 것이다. 보노보는 멸종위기에 처한 종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상상 이상으로 폭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침팬지와는 다르게, 보노보는 모계 중심 사회를 이루며 다정하고 공감능력 높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종이다. (그런 종이 국내에 '섹스 중독 원숭이'라고 소개된 건 역시 충격적이지만...) 그런 보노보를 매개로 하는 이야기이기에, 인간인 '이진이'의 영혼이 유체 이탈하여 보노보의 몸에 빙의하는 설정, 그리고 '지니'라는 이름을 갖게 된 보노보와 '이진이'의 교류는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진이의 스승은 동물들에 대한 이진이의 공감 능력을 동물에 대한 과도한 '의인화'라고 평가절하 하는데, 우리 사회 대다수가 동물을 다루는 시선이 이렇지 않을까? 소설에선 보노보 원숭이, 지니의 시점에서 그녀가 겪은 일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과 두려운 순간, 절망의 순간과 희망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작중, 동생의 출생과 성장을 보며 이보다 더 행복해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하는 지니의 모습은 소설 속 과장된 묘사가 아니라 실제 보노보 원숭이들의 습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노보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의 삶 속에서 '의인화'의 영역을 접하게 된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러주는 까마귀는 어떻고, 범고래로부터 먹잇감이 될 운명에 처한 펭귄을 구해준 돌고래 떼는 어떤가? 우리가 '짐승'이라 폄하하며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생명 따윈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간장 종지에는 라면도 못 끓이는 법이다."
- 「진이, 지니」 p.36

 우리 내면의 대립하는 대립물의 투쟁을 간장 종지와 모차르트로 비유해낸 게 너무 재밌었다. 이진이의 성장과 선택도 눈에 띄었지만, 그만큼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김민주의 성장이다. 공익요원 시절, 해병대 할아버지의 '어이'인지, '아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긴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갖고 평생을 살게 된 김민주. 대학 졸업 이후, 3년 동안 고시에 낙방한 채 맞이한 30살. 집에서 쫓겨나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8개월 간 사력을 다해 시험공부를 하던 그는, 결혼으로 팔자 펴서 "삼천만 원짜리 시계"를 차고 나온 동기와 "아무 데나" 취직해서 '아버지 회사'에 다니게 됐다는 동기의 이야기를 듣고, 맥이 빠져버린 채 돌아와 맞이한 고시원 자판기 아저씨의 자살로 결국 무너져버린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누구나 한번쯤 '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차라리 다 놓아버리자. 민주는 점점 생을 포기해가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기 위해 찾아온다던 무곡에서 위기에 처한 진이와 지니를 마주한다. 벌금 300만 원 앞에 벌벌 떠는 간장 종지와 해병대 할아버지의 '어이'인지, '아이'인지를 기억하는 모차르트의 다툼 끝에, 그는 모차르트의 손을 들어준다. 그 뒤로 그는 줄곧 '모차르트'의 손에 힘을 실어주며 간장 종지를 이겨내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간장종지의 힘이 강력하여, 1000만 원의 계약금을 걸었지만, 이후에는 내던져버린다. 끝내는, 민주 자신을 간장 종지에 가둬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를 이겨내기도 한다. 그 힘 역시도, 이진이와 지니를 구하기 위해서 나왔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이성적 판단이었을 대학과 공무원 시험을 넘어, 완전히 비이성적인 선택인 '진이, 지니'의 도움에 자신을 내던지며 그는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생과 죽음의 경계를 여는 '문지기', 닥터 K. 죽은 사람도 살린다던 한의사가 한순간의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장의사가 되었다는 짧은 인물 소개. 닥터 K 또한 이진이와 김민주처럼 '트라우마' 속에서 인생의 전환을 택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가 길게 나오진 않았지만, 그도 해병대 할아버지의 '어이'인지 '아이'인지를 무시했던 민주와 같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난 뒤, 장의사의 길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런 그가 민주에게 "타고난 장의사"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네가 얼마나 예뻤는데." 수줍은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는 배시시 웃었다.
- 「진이, 지니」 p.295

 이진이의 엄마는 강한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생(生)'을 악착같이 선택해온 사람이었으며, 딸인 진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교육했다. 그러다가 맞이한 죽음의 순간에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이진이가 엄마에게 받은 모정, 동물원에서 공개 출산의 트라우마로 자기 딸을 버린 침팬지의 모정, 버려진 침팬지, 팬의 종(種) 다른 엄마가 된 이진이의 모정,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지니 엄마의 모정, 엄마에게 버려진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결국 이진이 앞에 자랑스레 자신의 딸을 보여주며 미소 지은 팬의 모정, 김민주의 자살 파동(?)에 아버지를 눈물로 설득해 민주 앞에 서도록 만든 모정... 이처럼 소설에선 '모정'이 반복되고 강조된다.

 어미에게서 버려진 팬이, 진이에게서 받은 모정을 자신의 딸에게 이어주며, 진이에게 자신의 달라진 삶의 태도를 자랑하듯 딸을 들어 올려 보여주는 장면은 보지 않았는데도 본 것처럼 뭉클하다. 민주의 경우에도, 진이의 경우에서도 결국 산다는 건, 생의 의지와 힘은 자신을 향할 때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향할 때 강해진다. 소설 속, 노산으로 고통받는 어미를 위해 무리의 모든 암컷이 함께 출산의 고통을 나누는 보노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네 인간들의 삶도,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를 이루는 날이 오게 되길 소망한다. 내게도 이진이와 김민주, 닥터 K와 팬, 지니의 용기와 따뜻함이 자리하게 되길.

나와 지니는 너를 오래도록 기억할 거야. 네 형편없는 노래도. 
- 「진이, 지니」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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