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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리의 메모장/드라마가 체질

서른되면 괜찮아져요? <멜로가 체질> 후기&감상평

by 보미와 겨우리 2020. 6. 10.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라는 노래가 멜론챠트 1위를 휩쓸기 전부터 <멜로가 체질>의 소문을 들었다. "주인공은 30살 여자 세 명인데, 셋이 절친이고 같이 살아. 등장인물들이 같이 드라마를 만드는 내용인데, 그 드라마가 이 드라마야. PPL을 엄청 대놓고 자연스럽게 해. 노래들이 좋고,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야." 드라마를 다 본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이만큼 적절한 설명이 있을까 싶은데, 그 당시에는 도대체 그래서 이게 무슨 드라마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시작조차 안 했었다. 아마, 자기들끼리만 보고 싶은 마음에 설명을 대충 한 게 아닐까...? 착한 나는 더 많은 사람들과 이 드라마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매력 가득! 생동감 넘치는 세 주인공~!

 추천 받은지 일 년 가까이 된 <멜로가 체질>을 다시 꺼내보게 된 경위를 생각하다 보니, 다른 드라마 혹평이 먼저 떠올라버렸다. <사랑의 불시착>!!! 북한이라는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었는데, 묘사를 꽤 잘했다는 평을 들었고, 현빈과 손예진의 로맨스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6화 만에 꺼버렸다. 볼수록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손예진의 캐릭터와 북한 사회의 인물들과 남한 재벌가에 대한 평면적인 묘사에 질려버렸다. 반푼이 같은 여성 주인공(재벌가에서 가출(?)한 뒤, 한 회사의 대표를 맡아 성공시킬 정도로 능력있고, 자기감정을 숨기고 자기 이익을 위해 냉철하게 행동할 줄도 아는 캐릭터라서 처음엔 기대가 됐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친 건지, 북한에 가고 난 뒤부터는 반푼이가 돼버린다)을 지켜내는 백마 탄 왕자님의 서사는 계속 봐주기 민망했다.

손예진의 케릭터가 북한에 넘어가자마자 무너지지만 않았으면 그래도 끝까지 봤을텐데... 안뇽...

 북한 사회의 인물들은 "가난하지만, 억척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따뜻한 인정이 있는 마을 공동체"의 일원(동백꽃필 무렵의 옹산 마을 주민과 배우마저 겹쳐서, 이게 북한의 마을인지 옹산인지 헷갈린다)이거나, "세습 김 씨 왕조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며 인민들을 착취하고, 굶어 죽는 인민들을 모른척하는 악랄한 사이코패스" 양극단이다. 그 사이를 오가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마저도 평면적이다. 어우... 회장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아옹다옹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재벌 2세들의 묘사도 구리다. 다시 생각해도 민망하네... 그나마 6화까지 본 건, 북한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작가들이 자료를 많이 찾았겠다, 연출팀이 세트를 꾸미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네, 현빈 잘생겼다... 이정도?

맘에드는 포스터지만, 효봉이가 없는 포스터라서 이것 보단 아래 포스터가 더 좋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제목이 썩 끌리는 편은 아니었다. '멜로가 체질'? 분명 난 멜로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보는 편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가리켜 "난 멜로가 체질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주인공들의 달달함 보다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삶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낄 때,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렇지 않은 드라마는 못 봐주겠다.(사랑의 불시착..) 그런 면에서 드라마의 제목이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라면 어땠을까? 여러모로 문제가 될 수 있었겠지만, 이 드라마, 문제 없이 무난하게 가려고 만든 드라마는 아니잖은가? 그리고 "드라마 속의 드라마"라는 독특한 컨셉을 완전히 부각해서 흥미를 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처럼 "너무 대놓고 멜로는 싫은데.." 하는 생각으로 이 드라마를 놓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서른이면 어른되는 줄 알았는데...

 

 <멜로가 체질>이라는 제목 보다, <서른되면 괜찮아져요>란 제목이 더 좋았겠단 생각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이야기에서 생각보다 "멜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서다. 오히려 "서른 되면 어른될 줄 알았어?"라는 포스터의 메시지처럼, 나이 서른 즈음의 주인공들이 각자의 삶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이병헌 감독은 이제 드라마든 영화든, 힘을 뺀 듯하면서도 묵직한 삶의 이야기를 던지는 데 능수능란하게 보인다. 이번 작품은 지금까지 다뤄온 세대보다 더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다뤘는데도, 그 이야기의 생동감이 떨어지긴커녕, 훨씬 더 깊다. 영화도 좋지만, 드라마에서 다시 보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어딘가는 미쳐있다. 아프지 않은 사람 보다, 아픔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방법을 아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남초 다큐멘터리 제작 회사에서 직장 상사들에게 온갖 차별과 희롱을 당하다, 결국 회사를 뛰쳐나온 은정. "친일파"를 주제로 1인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선다. 명실상부한 친일파 직계 후손이라며 나타난 홍대. 그는 은정과 함께 <친일파 그 이후의 삶>이라는 드라마를 만들고, 사랑 따윈 없다던 은정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 홍대의 병과 죽음은 은정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은정은 홍대를 온전히 추모하지 못한 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환영과 환청을 보고 듣게 된다. 그녀는 삶의 모든 의미를 잃고, 자살시도를 하기 이른다. 그런 그녀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은정의 동생 효봉과 진주, 한주는 그녀의 집에 눌어붙어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멜로가 체질>은 1화에서부터 멜로라기 보단, 이제 서른을 맞이한 세 주인공의 삶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러다가 극 중반에 터져 나온 은정의 "나 안아줘. 힘들어. 너네한테 하는 말이야"라는 말 한마디에 천우희도 울고 나도 울었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아프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할 때,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러다 그 존재를 잃게 되진 않을까 두려워지고 마는 순간. 그 순간을 이렇게까지 잘 묘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외에도 셋의 두려움이 느껴졌던 장면들이 많다!

 이처럼 <멜로가 체질>은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기다려주는 것. 그게 백 마디 말과 행동보다 큰 힘이 되어줄 때가 있다는 교훈을 주는 드라마다. 주인공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갖고 서로에게서 위안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예를 들어 효봉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단골 찌개 집에서 쫓겨 나온다. 애인 앞에선 무던한 척했지만, 집에 와 은정에게 아픔을 털어놓고 함께 밥을 먹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성소수자를 다룬 작품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중 과장되지 않게 묘사되면서도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을 표현한 작품들이 좋았다. <멜로가 체질>에서 효봉의 캐릭터를 다루는 방법도 그렇다. 그의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정체성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게 명확하게 제시되어 좋다. 따뜻해!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 작가에서부터 모든 스태프들의 노동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 길 가다가 촬영 현장을잠깐 쳐다본 게 전부인 내가 알지 못하는 스크린 뒤의 세계. 배우에서부터 감독, 작가, 촬영, 연출, 조명, 매니저 등.. <멜로가 체질>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스크린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드라마/영화를 보고 좋아하거나 욕하면 그만이었던 내게 다시 한번 생각거리를 안겨줬다. 주 52시간 노동에 대한 대사도 그렇고, 살인적인 제작 스케줄과 제작환경 속에서 죽어간 청년들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들도 있었다. 16부가 다 끝난 뒤, 마치 극장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제작진의 이름 하나하나가 굵은 글씨로 올라가는 것도 좋았다. 

 꽤 오래 생각날 것 같은 드라마다. 극 중 진주와 범수가 시즌제에 대한 얘기를 했었는데, 시즌제로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시청률 1%... 작지만 강한 우리 1% 시청자들의 힘으로 시즌2 소식을 언젠가 들을 수 있길!!!

은정의 집에서 동거하는 네 명의 친구들, 이들의 수다가 드라마를 이끌어간다.

 아쉬운 부분이 없을 순 없다. 이들의 동거를 가능하게 한 건, 은정의 다큐멘터리가 초초초초 대박이 났기 때문이다. 진주의 공모전 출품작도 '우연히' 스타 감독 손범수의 손에 들어가 제작에 이르게 된다. 그나마 한주의 이야기는 조금 현실적으로 다가오긴 한다. 곁에 은정과 진주 같은 친구가 있단 건 비현실적이지만. 진주가 동생에게 말하듯.

"와 인생이 그냥 뭐 '없는 거야'."

"그나마 이게 성공사례야.
널리고 널린 진짜 비극을 말해줘?"

- 드라마 <멜로가 체질> 12

 애초에 드라마를 소련이나 이북식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만들 게 아니라면, '진짜 비극'을 순한 맛으로 포장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순 없으니 아쉬울 것도 아니다. 아쉬운 건 오히려 인물들이 너무 생동감 있다 보니 작품 속 인물들에게 너무 공감하다가 생겼다. 작중 인물들에게 공감을 하면 할수록, 이들과 나의 괴리감이 크게 다가왔다. 매화마다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인물들의 명대사는 나의 깊이 없음을, 진주와 범수가 드라마 제작을 통해 보여주는 열정적인 모습은 나의 무기력함을, 한주와 재훈이 성숙해지는 과정은 나의 어리석음을, 은정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나의 나약함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속물적으론, "나도 크게 (금전적으로) 성공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며, 인물들에게 시샘까지 나더라. 12화 언저리를 볼 땐, 이것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이것도 작품의 결점은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성들의 이야기를 표방한 작품의 숙명일까? 한쪽에선 페미니즘 드라마라며 보이콧을, 다른 한 쪽에선 "아직 한참 멀었다!"며 보이콧을 한다. 양쪽 다 머리를 지끈하게 만든다. 난 그저 서로에게 상처 입히지 않고, 조금씩만 더 따뜻해지는 사회를 바란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멜로가 체질>은 내 마음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맛있게 떠들고 맛있게 먹고 맛있게 사랑하는 우리의 지금을 응원하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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